6월 초를 관통하는 가장 큰 화두는 단연 Black Lives Matter 운동이다. 하지만 여느 운동의 양상처럼 누군가는 국소적인 흠을 이유로 운동 전체를 폄훼하거나, 옹호를 한다고서 혐오적으로 대응을 하느라 찬반 진영의 골을 더 벌려놓고는 한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운동이든 완벽하지 않다는 것부터 인정해야 한다. 그 흠결이 조직원에게서 유래할 수도, 운동의 논리적 한계 자체에 기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운동의 핵심에 주목해야 한다. 워마드가 있다고 페미니즘이 래디컬한 반남성주의라고 볼 수 없다. 또한, 부작용은 복잡한 이유에서 발생한다. 예를 들자면, 한국 사회에서 다양성을 바탕으로 한 토론이 가능했다면 일베나 워마드가 탄생할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확신은 못하지만, 페미니즘이 반드시 래디컬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게 요점이다.)

이번 Black Lives Matter 역시 여러 약점을 지니고 있다. 흔한 주장처럼 폭력 시위의 불똥이 아시아계에게 번지는 것도 사실이고, 운동에 동참하지 않는 이들을 레이시스트라고 공격하는 것도 지나치다. 흑인들이 미국 역사 속에서 꾸준히 구조적인 차별을 받아온 것은 알겠지만,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토론의 대상을 무지한 이로 매도하는 것 역시 어리석은 행위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기계적으로 반대할 순 없다. 표면적인 기치는 플로이드의 죽음을 향한 분노와 흑인 차별이지만, 핵심은 분명히 범인류적인 인종차별의 철폐이다. 이 불완전하고 때론 폭력적인 운동은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휘청거리며 나아가는 발걸음인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다면 먼 발치에서 기계적인 반대를 쏟아낼 게 아니라, 약탈반대를 촉구하는 목소리를 주입해야 한다. 구더기 무섭다고 장을 안담글 것이 아니라, 구더기만 없앨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회구조를 향한 싸움이며 혁명이고, 내외부적으로 손실없이 결과를 얻어내기 어려운 사안이기 때문이다.

운동의 내부에도 각성해야 할 문제점이 있다. 우린 ‘우린 옳다’라는 자기최면에 빠져 폭력성이 짙어지고, 정상성의 논리를 잃고, 핵심없는 공격만 남는 운동을 많이 보아왔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예는 역시 페미니즘 아닐까. 일부 래디컬 페미니즘, 백래시, 백래시를 향한 역공, 혐오와 확산 등에 적잖은 사람이 피폐해진다. 가장 좋지 않은 것은 갈등이 극단화 되면서 화해나 상호이해의 가능성이 0에 수렴해간다는 것이다. 대개의 인권운동에서 비판대상은 궁극적인 연대의 대상이기도 하다. 연대의 대상과 돌이킬 수 없는 척을 진다면, 단기적인 승리 뒤에 길게 뒤따를 장기적 실패를 생산하는 셈이다. 포용없는 점령전은 게릴라를 낳을 것이다. (사실 점령에서 승리한 것도 아닐테지만) 이 지점에서 감정이 앞선 성급함이나 자신의 정당성을 이 악물고 지키려는 개인들을 많이 목격한다. 이것은 장기적 전략의 부재이며 이론을 공급하며 운동을 이끄는 이들의 의무 방기이다. 아 더 쓰기 귀찮다…

위에서 언급한 두 경우- 운동의 외부에서 비판하는 자와 운동의 내부에서 헛되이 싸우는 투사를 ‘운동을 축소하는 자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들에게도 나름의 순기능이 있겠지만, 자신이 굳게 믿는 정당성 아래 순진하게 칼 같은 혀를 휘두르는 이들의 결국 공동체의 분단을 이끌 것이다.

꼭 다루어야 하는 예외가 있다면 실제 피해자로서 살아온 자들이 고통과 억울함을 표출하는 것이다. 하지만 공격적 운동은 치유의 방법이 아니다. 나는 외부를 향한 싸움을 통해 상처가 제대로 아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자신의 이해, 타인의 이해, 그리고 돌봄과 사랑만이 약이 된다. 세상을 향한 싸움을 말릴 수는 없지만 자신을 향한 치료를 잊지 말았으면 한다. 부디 그 고통을 이해하는 사람이 많고 자신도 편안함에 이르길…

한편, 운동이 실패한다고 그 실패 지점에 붙들려 있으면 안된다. 단기적으로 운동은 실패할 수 있지만 사회는 그 운동의 충격을 실감했을 것이고, 그 어젠다에 동조하는 사람도 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은 확대된 어젠다와 세련된 이론을 갖춘 운동으로 세상에 다시 도전해야만 한다.

앞서 기술한 요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사회 운동은 언제나 불완전하며, 진보는 나은 답을 찾기 위한 과정이기에 실패를 수반할 수 밖에 없다. 다음은 장기적인 승리는 비판의 대상과의 연대이기 때문에 강경한 수단을 쓰며 피를 흘릴 수는 있겠지만 항구적인 증오를 되도록 남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고 배우며 나은 세계의 심상을 더 많은 이에게 확신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