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어릴 적부터 체력적으로 강해지길 원했다. 운동을 잘하고 싶진 않았다. 단지 강한 몸을 향한 열망이 있었다. 운동장을 열바퀴씩 달렸고, 자전거로 언덕을 오르고, 어깨에 자전거를 들쳐매고 학교 뒷산을 넘기도 했다. 집에서는 윗몸 일으키기도 하고 덤벨도 곧잘 들었다. 학교 친구들은 내가 강하고 건강하다고 생각했을테다. 하지만 타고난 허악함은 노력으로 넘기 어려운 높은 벽이었다.

대학생이 되었다.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는 남매는 미성년일 때부터 건강한 삶과 거리가 멀었고, 건강한 가사에도 능하지 못했다. 요령부득에 재정파탄까지 뒤따랐다. 스무 살을 전후로 가계가 완전히 무너졌다. 신선하거나 건강한 식자재를 사먹기도 쉽지 않았고, 저렴한 월세를 찾아 습하고 어두운 집에서 살아야 했다. 여름이면 바닥에서 물기가 올라왔다. 벽지는 녹색으로 물들었다. 누나의 아토피는 나아질 기미가 없었고, 나는 기침이 늘었다. 조금이나마 상황을 개선할 요령이나 지식도 없었다. 보일러나 곰팡이 제거제보다 제습기가 도움이 된다는 건 그 집에서 나오고서야 알게되었다. 지금도 그 집의 전 세입자가 건강이 나빠져 고향에 돌아간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가계의 곤란이 계속되니 학업을 중단하고 일을 해야 했다. 아르바이트로 학비나 생활비를 마련하는 사람이 없진 않지만, 당시에는 생활비가 까마득한 거액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은 대학생의 아르바이트는 용돈벌이라고 생각했다. 하루 8시간 홀서빙을 하고는 40만원의 월급을 받았고, 밤에 초등학교의 시험지를 편집해서 20만원을 받을 수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감기에 걸려도 일을 멈출 수 없었다. 짧은 기간동안 어설픈 인터넷 학습지 회사의 텔레마케터로 일하기도 했다. 구역질 나는 일이다. 열 시간을 자도 스트레스를 씻을 수 없었다. 채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뒀지만, 이미 몸과 마음이 상당히 상한 후였다. 이후에는 친구의 추천으로 제대로 된 회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2천만원의 연봉은 내게 닥친 경제적 어려움을 해소해 주었다. 하늘에서 구명줄이 내려오는 것 같았다. 회사는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었고 야근이 잦았지만, 책상에 앉아 하는 일은 체력적으로 훨씬 수월했다. 지하철이 끊긴 시간이면 회사가 임대한 역삼역 옆의 숙소에서 잤고, 새벽까지 일할 때면 서버실의 온기와 소음에 시달리며 라꾸라꾸 침대 위에서 잠을 청했다. 그래도 한동안은 즐거운 나날이었다. 하지만 잦은 야근은 몸에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하루는 출근을 하며 걷는 중에 손가락 끝이 아파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손을 눈 앞에 가져왔지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하얀 손에선 통증이 사라졌다. 다시 걷다보니 손가락 끝이 아팠다. 어쩐 일인가 싶었더니 너무 약해진 심장이 아래쪽으로 쏠린 혈액을 다시 위로 순환시키지 못하는 것이었다. 손을 내리면 빨개지고 올리면 하얘졌다. 그 무렵엔 심장의 이상을 체감하고 있었다. 피곤할 때면 심박이 불규칙적인 것 같았고 종종 미세한 떨림을 느꼈다. 심장병을 앓고 있는 지인이 협심증이 의심된다고 말해줬다.

회사를 그만두고 학교로 돌아갔다. 등록금을 모으지는 못했지만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배짱이 있었다. 석사를 하고 군대 문제를 수월히 풀어야겠다는 계산도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돈, 가족관계, 학업, 미래, 모든 것이 암울했다. 학업을 하면서도 돈은 벌어야 했다. 자는 시간을 줄여 일할 시간을 마련했다. 하루에 네 시간을 못자는 날이 이어졌다. 연구실의 라꾸라꾸 침대에서 자는 일도 잦았다. 몸이 극도로 허약해졌다. 걷다보면 다리가 덜컥 덜컥 꺾이는 일이 잦았다. 하루는 계단 세 개 정도의 높이에서 가볍게 뛰어내리고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상황이 이쯤으로 악화되니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운동을 해야 했다. 운동을 시작했을 때는 푸쉬업 열 개를 하기 어려웠다.

석사를 마친 후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누나와 함께 살던 반지하 집을 나와 달동네 건물의 2층에 세를 얻었다. 전에 살던 집의 곰팡이와 습기의 악영향을 깨닫기 시작했다. 체력은 바닥을 찍은 후 반등하고 있었다. 단순하게나마 운동을 체계화했고 일일 달성량과 장기목표를 세웠다. 자전거를 사서 한강과 중랑천을 달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영향으로 동경하던 달리기를 시작했다. 한두번 가본 적 있던 헬스장을 본격적으로 다니기로 했다. 몸매에 큰 변화는 없었지만 정신과 육체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들을 체감하기 시작했다. 운동을 하지 않은 날은 몸이 근질근질했다. 운동을 하면서 기억에 남은 아름다운 순간들도 있다. 홍과 자전거로 한강을 거슬러 오르다 만난 가게에서 먹은 열무냉면을 아직 기억한다. 야근 후 소월로를 달리며 내려다본 서울의 야경을 기억한다. 난 조금씩 건강해지고 행복해지고 있었다. 한국 나이로 서른살의 해가 끝나가던 때 이직을 했고 제주로 이주했다. 엄두도 내지 못했던 PT를 받았다. 코칭과 체계적 관리의 위력을 여실히 느낀 경험이었고, 체력의 향상도 있었다. 하지만 비용을 계속 감당하기 어려워 한 달의 체험으로 끝났다. 천국과 같은 제주의 여름이 오면, 주말마다 파도가 잦고 수심이 깊은 포구를 찾아 녹초가 될 때까지 다이빙을 하고 헤엄을 쳤다. 제주에서의 몇 년간 여러 번의 10km 마라톤과 한 번의 20km 마라톤에 참가했다. 달리기는 습관이자 의식이 되었다. 어느 날은 인근 초등학교 운동장을 달렸고, 어느 날은 귤밭 돌담길을 달렸다. 가끔은 차를 몰고 멀리 나가 바다를 낀 길을 달리기도 했다. 일상 속의 피로감이 나날이 커져가며 노화를 체감했지만, 꾸준히 달리기를 하는 기간에는 활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관절의 통증이 조금씩 커지고 그 주기도 짧아지고 있었다. 20대 중후반부터 과음 후에 가끔 느낄 수 있던 통증이 일상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병원을 세군데나 찾았지만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달리기는 중단해야 했고, 대안으로 수영을 하려 했지만 다양한 사정으로 한 달만 배우고 접어야 했다.

본격적으로 독일 이주를 준비할 무렵 골반 주위의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큰 기대없이 시도해본 것 치고는 효과가 좋았다. 모빌리티가 확연히 달라졌고, 운동 전후의 통증도 줄었다. 고관절이나 뼈의 문제가 아니라 주위 인대와 근육의 문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달리기를 할 때는 주의를 기울여야 했고 통증은 계속 되었다. 지금까지도 통증이 호전되는가 싶어 방심하고 있으면 다시 재발한다.

지금은 코로나 사태로 집에 틀어박혀 있지만, 상황이 좋아지면 수영부터 배우고 싶다. 체력 향상에도 좋고, 고관절에 무리가 가지 않는데다, 물을 가르는 재미를 알고싶기도 하고, 노인이 되어서도 할 수 있다.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고 싶기도 하다. 편도 20~30분의 거리를 매일마다 자전거로 왕복하는 건 좋은 심폐 훈련일 것이다. 언젠가 고관절이 회복되면, 그 무엇보다 달리기를 다시 하고싶다. 해가 어스름히 떠오르는 시각에 코 끝으로 차가운 공기를 가르는 느낌, 햇살 아래에서 파도 소리를 들으며 해안도로를 달리는 기분, 숲 속에서 흙길을 박차며 달리던 상쾌함을 다시 느끼고 싶다. 긴 인고에 몸과 마음이 시달린만큼 에고가 희미해지고 세상과의 합일감을 느끼던 때, 마치 무엇에도 얽메이지 않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듯한 체험을 다시 겪어보고 싶다. 언제가 될 지도, 앞으로 다시는 그럴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겪어봤으니 됐다’라고 치부하기엔 나는 아직 젊고, 회복의 희망을 버릴 수 없다.

내 삶을 극적으로 바꾼 몇 가지 사건 중 하나가 20대 후반 들어 운동을 습관으로 만든 것이다. 순전히 자신의 의지로 한 일이고, 그 효과가 너무나 긍정적이라서 그 의미가 크다. 운동이 주는 만족감은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줬고, 노력과 성취의 사이클은 자존감의 양분이 되었다. 애초에 허약한 체질이라 사람답게 살고 있다는 실감을 하려면 운동을 하는 기간 동안에만 느낄 수 있는 활력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릴 적엔 만화와 같은 미디어의 영향으로 격투기 선수같은 강함을 동경했다. 성적으로 매력적인 근육질 몸을 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학생 또는 회사원으로서의 삶은 그런 목표를 이루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운동을 하려면 시간을 들여야 하고, 상당한 지식 또는 전문가의 코칭이 필요하다. 30대 초반까지 잠은 항상 부족했으니 잘 자는 것이 특히나 어려웠다. 필요와 생존에 의해 운동의 목적이 점점 바뀌어왔다. 더 절실한 목표에게 우선순위가 밀려난 것들을 한참 덜어내고 나니 가까스로 다양한 욕구들과 현실의 제약이 조화를 이루는 지점에 도달했다. 운동에 관한 목표도 그렇게 다듬어졌다. 남은 것은 생활 체력, 즉, 나의 삶을 전진시키는 육체의 힘이 현재의 지향점이다.

나는 공부를 위해 술도 줄이고 친구들과 거리를 두기도 했다. 30대 중반부터는 뒤늦게 마감일을 알게 된 작가처럼 내게 남겨진 시간을 자각하게 되었다. (20살 이후로 15년이 지났다. 앞으로 15년이 지나면 50세이다. 학습능력의 저하와 이른 퇴직을 염두에 둘 나이가 된다. 간단한 셈이다.) 남겨진 시간을 잘 활용하는 방법은 시간 관리와 효율 향상인데, 효율은 운동에 좌우된다고 믿는다. 운동을 하는 동안에는 집중력, 수행력, 이해력, 암기력, 지구력 등이 비약적으로 향상된다. 달리기는 그 자체로 기쁨이고, 운동은 행복과 건강을 안겨주지만, 체력은 내 꿈을 위해서 손에 넣어야 할 수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