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작년 여름만해도 읽기 훈련의 효과 중 하나가 문장 구조를 해석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어의 구조란 언어를 해석해낸 이론일 뿐, 뇌가 언어를 이해하는 직관적 방식과는 거리가 있다. 성인이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서는 문법을 통해 구조적인 해석이 필요하긴 하지만, 해석은 배우는 과정일 뿐이다. 우리의 최종 목표인 언어 구사 능력은 뇌에서 자동적으로 이뤄지는 직관적 과정에 가까운데, 직관이 뇌에 자리잡으면 구조의 해석따윈 필요하지 않다. 더 나아간다면 문법도 중요하지 않게 된다. 우리가 문법을 따지면서 국어를 사용하지 않잖아?

직관은 지식과 다른 방법으로 익혀야 한다. 연습이든 실전이든, 아무튼 직접 사용하며, 이른바 을 다듬는 것이 가장 유효하다. 다만 시작 지점의 문턱이 높은데, 성인이 언어를 사용해내기 위해서는 시작부터 다양한 지식과 세부 스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스킬들은 흔히 문법, 청해, 어휘 등으로 분류가 된다. 이 글을 읽을만한 사람들은 이미 알겠지만, 우리는 이것들을 따로따로 훈련하는 것이 익숙하다. 최소한 그런 고립훈련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영어 실전, 즉 영어를 사용할 때는 각 기술이 종합적으로 수행되는만큼 top-down적인 훈련이라 볼 수 있고, 각각의 스킬 훈련은 bottom-up 방식이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종합적 수행을 동반하며 큰 그림을 조망하는 top-down이 우세한 종목도 있고, 세부 항목들을 익혀가며 큰 그림을 채워가는 bottom-up의 수련이 어울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top-down과 bottom-up은 상보적이기에 함께 해나가야 하고, 언어의 경우 점점 top-down의 비율을 늘려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Bottom-up의 경험, 즉 세부 스킬 훈련에 관해 회고하려고 한다면… 내가 영어를 공부해 온 평생의 경험을 털어놓아야 할 지 모른다. 2017년의 intensive 셰도잉이 발음에 큰 변화를 줬고, 2020년 말부터 지금껏 매일 하고 있는 어휘 공부가 그나마 특별한 변화를 줬달까.

반면 top-down이 가능해진 건 꽤나 최근이고, 뚜렷한 변곡점의 시점이 여럿 있었다. 2017년에는 나의 첫 원어민 선생님인 Alissa에게 작문 첨삭 과외를 받기 시작했고, 영어로 책을 읽기 시작한 것도 그 해 말이었다. 2018년에 외국인 친구들과 어울리며 되도 안되는 영어로 대화하게 되었다. 결국 2019년에 독일로 넘어와 영어가 1언어인 회사에서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최근 몇 년째 일상적인 인풋을 영어로 대체하려고도 애쓰는 중이다.

작년 말에서 올해로 넘어올 때는 특별한 경험이 있었다. 일종의 intensive top-down 훈련이었달까. 작년 말에 2~3주 정도 휴가를 가지면서 영어 텍스트를 상당히 열심히 읽었다. 이것저것 읽긴 했지만, 주로 전공서적 하나와 어린이 소설 하나를 붙잡고 매일 같이 씨름했다. 하루하루 몇 페이지를 읽었는지 표에 기록해가며 진도를 남기기도 했다. 그랬더니 뇌가 개변하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읽는 능력이 개선되어 갔다. 하루 단위로 느낌이 달라졌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놀라운 경험이었다. 예전에는 그렇게 할 수 없었는데 어느새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몇년 전에는 뭐라도 읽으려고 치면 모르는 단어가 워낙 많고 문법도 이해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보니 읽은 것도 없이 지치기 일쑤였는데… 국문처럼 읽지는 못하고 거북이처럼 느리지만, 그럭저럭 재미를 느낄만한 수준의 독해가 되었던 것이다. 2년이 넘는 동안 거의 매일 어휘 암기를 하고, 짧지 않은 회사 생활을 거쳐서 드디어 다음 수준의 학습이 가능한 레벨에 올랐다. 크흡… 감격…

평소 회사에서도 영어를 사용하는데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던 걸까? 회사에서 영어를 사용하며 실력을 키우는 전략은 실전을 통한 extensive 훈련이라고 할 수 있겠다. 패턴을 굳이 분석해보자면 강도도 낮고, 비슷한 표현을 반복하기도 하지. 한편, 내 수준을 넘어가는 인풋은 그냥 흘려보내게 되기도 한다. 최고 도달지점과 효율의 관점에서는 실전만으로 성장을 기대하는 것은 최고의 전략이 아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휴가를 마치고 회사에 돌아왔을 때에도 특별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책을 열심히 읽고 돌아왔는데 회사 동료들과의 대화가 예전보다 수월했다. 듣는 것만 아니라, 말하는 것마저. 읽기 comprehension의 향상이 다른 스킬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듣기에 있어서는 알고 있어야 들린다라는 오랜 명제가 다시 한 번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모르던 걸 알게되어서 들렸다기 보다는, 이해력이 좀 더 날카로워져있기 때문이었던 것 같지만. 말하는 능력의 향상에 있어서는 조금 미묘한 이론을 가지고 있는데… 인풋이 많아져서 표현력이 좋아졌다기 보다는, 언어를 표현할 때도 comprehension 능력이 힘을 발휘했다는 것. 말하려는 것을 스스로 잘 이해해야 더 나은 말을 더 빠르고 덜 수고스럽게 할 수 있지 않나 싶다.

몇 년 동안 읽기와 듣기-퉁쳐서 comprehension-에 어려움을 갖고 있던 나에게는 특별한 발견이었다. 인풋, 특히 많이 읽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금 실감하는 경험이었달까. 굳이 읽는 것이 듣는 것보다 좋은 이유를 꼽으라면, 대체로 글이 말보다 품질이 좋고, 이해가 어려운 문장을 되새길 수도 있고, 내 페이스에 맞추기도 수월하다. 이런저런 장점이 많은 셈.

2년 전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고 남긴 블로그 포스팅의 결론도 이번 글과 비슷한 것 같다. 결국 읽는 것이 중요하다. Stephen Krashen이 강조하는 ‘어쩔 줄 모를 정도로 재미있는 책을 정신없이 읽는’ 경험은 아직까지도 소원하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