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맙소사… 이번 연말은 엉망이었다. 이래저래 다른 요소들이 있기는 했다만, performance review 작업에 시간을 많이 쓴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먼저, 나중에 이 글을 돌아봤을 때 맥락을 기억해내기 위해서 배경을 정리해보련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는 상반기 말에 mid-year performance check-in을, 연말에는 year-end performance review를 실행한다. Performance check-in의 결과가 직급과 급여에 영향을 주는 일도 있지만, 가끔 발생하는 일이다. 보통은 신변에 별 일이 없이 지나가고, 매니저와 함께 남은 반년을 위해 development plan을 짜기도 한다. 한 해의 중간에 하는 만큼, 연말 review를 위한 예행연습의 성격이 강하다. 지난 달에 한 작업도 기억나지 않는데, 아무래도 중간에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고 지난 한 해를 통채로 돌아보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연말 review는 압도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 review의 결과를 통해서 다음 해에 연봉 인상 폭이 결정되고, 승진 트랙을 밟고 있던 이들의 승진 여부가 갈리니 말이다.

일반 직원들이 해야 하는 일은 상반기 check-in이나 연말 review나 대동소이하다. 크게 두 가지 글을 작성해야 하는데, 하나는 self-evaluation, 다른 하나는 360 feedback이다.

지난 토요일, 12월 23일부터 self-evaluation 작성을 시작했다. Self-evaluation은 직역 그대로 자기 평가다. 예전에는 개인의 역량과 회사의 vision을 바탕으로 작성했다. 그러다 이번 회차부터는 역량과 예시, 그리고 성과를 개인의 커리어 프레임워크에 짜맞춰서 구성해야 한다. 커리어 프레임워크는 9가지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가 한 업무 성과를 어떤 요소에 적용을 할 지 생각해내는게 쉽지 않았다. 결국 어떤 업무 A는 Architecture, Execution, Collaboration, 세 가지 요소를 적용하고, 다른 업무 B는 Technical Competence, Quality of Work, Business Expertise/Product Thinking, 등에 적용을 시키는 식이다. 몇 시간 동안 내가 한 일들을 되돌아보며 커리어 프레임워크 문서를 반복해서 읽다보니 감이 오긴 했는데… 이걸 다 적고나니 상당히 긴 목록이 되었고, 사흘에 걸쳐 장장 8시간 가까운 시간을 소비한 후였다. 1차 빡침의 순간이었다.

이제는 많은 IT 기업에서 360 feedback을 도입했다. 쉽게 말해 회사 동료들끼리 주고받는 칭찬 또는 제안이다. 칭찬이라고 말했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피드백 대상자가 어떤 역량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 파악하기 위한 정보로 활용된다. 제안이란 대개 ‘어떤 점이 모자라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래서 몇 년 사이, 업계에서는 constructive-feedback이라는 대체 용어를 사용한다. 돌려 말하면서 직관적으로 의미가 와닿지 않는 단어일 수록 중립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래도 나름 최선이 아닐까 싶은 게, 나 역시 회색의 건조한 뉘앙스를 느끼긴 하기 때문이다.

(한숨) 매번 360 feedback을 작성할 때마다 딥빡이 밀려온다. (찌푸림)

일단, 업무를 잘 모르는 다른 팀 동료에 관한 피드백 요청을 받을 때가 있다. 내가 그의 업무를 이해하지 못하고 어떤 일을 했는지도 잘 알지 못하는데, 서로의 업무가 조금 얽혀있거나 단편적인 도움을 주고 받았다고 나에게 피드백 요청이 오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 그의 역량을 적을 수 있을까? 그저 입에 발린 얄팍한 칭찬을 한 두 문장 늘어놓고, 관련있을 법한 커리어 프레임워크 요소를 늘어놓을 뿐이다. “Charlie는 나의 질문에 성의껏 대답을 해줬다. 그의 지식은 Technical Competence를 보여주며, 뛰어난 Collaboration 스킬로 의사소통을 수행했다.” 같은 식이다. 오, 맙소사.

어떤 경우에는 아예 어떤 업무를 했는지 모르는 사람의 피드백 요청도 들어온다. 한때 “일 잘하는 것 같아. 사람은 착해.” 수준의 성의없는 피드백을 쓰기도 했지만, 이제는 아예 피드백을 거절하기도 한다.

그놈의 Constructive-feedback은 더 어렵다. 모자란 점이든 아쉬운 점이든, 가까운 거리에서 진득하게 지내봐야 알 수 있는데 말이지. 어떤 일을 했는지 잘했는지 못했는지 판단이 어려운데 어떤 제안을 할 수 있을까? 가까운 동료라면 설령 단점이 눈에 띄지 않더라도, 장점을 숙고하다보면 장점의 그늘 아래에 숨은 미숙한 점을 찾아낼 수는 있다. 언제나 기술적으로는 매우 뛰어난 동료여서 우러러보고 있었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토론이나 기술 발표 등에서는 두각을 드러내지 않는 경우라든지 말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 가깝지 않은데다 나와 함께 일한 적도 적은 동료라면… 어떤 역량을 성장시켜야 하는지 알기 어렵다. 하루 이틀 가볍게 기술적인 대화만 한 사이인데, 그가 보여준 적이 없다고 해서 뜬금없이 “비즈니스의 이해도가 모자라다“라고 적을 수는 없는 일이다.

피드백 대상자는 회차를 거듭할 때마다 야금야금 늘어나서, 지난 check-in에는 12명, 이번 review에는 13명이 되었다. 사내 전산 시스템에서 한 페이지에도 다 나열되지 않는 이름의 목록을 보며 머리가 아찔했다.

잘 모르는 동료의 피드백은 쓰기 힘들지만, 가까이에서 일한 동료의 피드백은 쓰기 수월하다. 특히 올해는 업무 중 토론을 더 부추겼기 때문에 서로의 업무 역량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 지점에 함정이 있다. 쓰기 수월한만큼 쓸 내용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만큼 애정이 있으니 긍정적 역량 평가는 길어지고, 그의 성장을 기대하는 마음에 constructive-feedback도 상세해진다. 쓰고 있는 동안에는 친구를 대하는 정을 품고 있으니 기쁘기야 하지만, 긴 시간을 매달리고 난 후에는 상당한 허탈감이 닥쳐온다.

360 feedback은 어제, 12월 28일 목요일에 시작해서 오늘, 29일 금요일에 되어서야 마무리했다. 최대한 간소하고 신속하게 쓰려고 했지만 소비한 시간을 되짚어보니, 역시나 8시간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제서야 나의 딥딥빡의 근본적 이유를 밝힌다. 나는 12월 마지막 주 통채로 휴가를 냈는데, 그 내내 회사 업무를 한 것이다. 악! 아아악!!! 악!!! 악!! 악악악악!!!!!!! (격노) 왜 휴가에 일을 했냐고? 데드라인이 그렇다는데, 제대로 안끝내면 평가에 불이익이 있을 거라는데, 한낯 회사원이 뭘 어떻게 해!

기분은 나쁘지만, 나름 좋은 분위기를 누리기 위해 사흘 연달아 unter den liden의 주립 도서관에 갔다. 이 도서관은 1913년에 네오 바로크 식으로 지어졌는데, 전쟁으로 인한 파괴, 복원과 개보수를 거쳐, 현재는 웅장한 석조 양식과 현대 양식의 조화를 뽐내는 아름다운 건물이다. 여기서라면 다소 괴로운 일도 견뎌낼 수 있다. 마음이 누그러든다…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겐 뜬금없는 정보지만, 빡친 의식의 흐름을 가다듬기 위해서 적어야만 했다. 이 도서관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아주는 사람이라도 이 갑작스러운 전개를 이해해줄까. 전적으로 글쓴이를 위한 문단이다.)

오늘은 12월 29일 금요일이다. 지난 22일부터 시작된 11일 간의 휴가의 8일 째에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 그나마 휴가의 시작은 은근히 느긋하게 보냈다. 지난 사흘은 깊은 억울함을 품은 채 폭풍처럼 보냈고. 남은 사흘의 휴가는, 그저 서두르지 않고 충만히, 생산적이면서 느긋하게 보내고 싶다. 아내와 영화도 보고, 여느 때의 연말처럼 약간의 좌절에 젖어 지난 해를 회고하고, 사전에 기획한 에세이도 쓰고. 그런 마음이다. 해가 저문지는 이미 오래고, 잠에 들 시간이 다가온다. 따뜻한 차를 마시고 포근한 어둠에 몸을 늬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