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겨울, 가계가 급속히 기울어 더 이상 대학을 다닐 수 없어 몇 달째 저임금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있다. 그러다 신년이 시작될 때 친구의 소개로 계약직으로 프로그래머 일을 시작했다. 갖가지 격류에 휩쓸려가던 나에게 다양한 의미가 있던 사건이었지만, 그 무엇보다- 당장 눈 앞에 닥친 빈곤과 기아, 시시각각 다가오던 질병의 위기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몇 년 후에는 대학에 돌아갈 수 있었고, 석사도 따고, 회사원으로 군대체복무를 하고, 제주에서도 일을 하고, 베를린에 오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다. 그 20년 동안, 학교를 다닐 때도, 이직 사이에 일을 쉴 때도, 나는 계속 직업으로서의 프로그래머, 개발자,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였다.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결정적인 발단은 처음 회사에 들어가서 커리어를 시작하던 그 날이었다.

개발자 커리어는 내 인생에 큰 의미이다. 하지만 일 자체를, 소프트웨어 산업을 그 자체로 깊이 사랑하진 않았다. 내가 가장 즐겼던 것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었다. 사무실에 출근해 인사를 나누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과 함께 일하며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즐거웠고, 그 대가를 받는 것에 만족했다. 회사 건물을 나서서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는 동안 나누는 술잔과 이야기가 좋았다.

어쩌다보니 지금은 식상한 명제 안에 갇혀있다. 이 회사가 주는 금전적 보상은 나쁘지 않지만, 이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즐겁지 않다. 소프트웨어 업곙의 표준 커리어와 학습 로드맵 따위에 관심이 없어졌다. 아직도 난 내 동료들을 좋아하지만, 균열에 쇄기를 박는 건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팀을 옮길 생각을 하다, 회사를 떠날 생각을 하고, 커리어까지 바꿀 생각을 하는 요즘이다.

어쩌면 적당한 시점에 나의 변화를 유도하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소프트웨어 업계 전체가 AI의 출현으로 출렁이고, 개인적인 관심사도 개인 생활과 기업의 제품에 함께 활용할만한 기술로 옮겨가고 있고, 사람의 삶에 바로 긍정적인 영향을 줄 제품을 만들고 싶기도 하다. 필요없는 것을 줄이고, 정말 원하고 추구하는 것에 집중하면서, 내 여러 바람을 한데 엮었을 때 가장 부합하는 길을 찾고싶다.

생각을 조금씩 정리해나가고 있다. 적확한 행동으로 옮길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