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만들기로 하다
실패한 꿈
나는 한때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푹 빠져 살았고, 그 무렵의 꿈은 만화가였다. 애니메이터를 꿈꾼 적도 있었다. 동네 만화 대여점에서 볼만한 만화들은 거의 섭렵하고 있었고, 국내에 소개된 굵직한 일본 애니메이션은 웬만큼 꿰고 있었다. 하지만 그 꿈을 위해서 내가 한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그림은 어느정도 그리긴 했다. 동호회도 들고, 미술학원도 다니고, 특강도 찾아듣고, 몇 년 동안 라이프 드로잉도 꾸준히 하고, 얼굴 드로잉 연구도 꽤 했다. 그러나, 그렇게 그림만 배워서 이룬게 뭐지? 만화가를 꿈꿨다기에는 습작은 하나 밖에 없었고, 제대로 스토리를 쓴 적도, 세계관이나 인물을 구상한 적도 없다. 작년에 Midjourney와 Dall-E가 세간에 이슈로 떠오르며 아예 그림에서도 손을 놓았다.
길을 잘못 들었다. 나는 구체적인 장래를 구상하고 현실적이고 체계적으로 달성해나가는 능력이 심각하도록 부족했다. 두리뭉실한 꿈을 세워놓고 체계적인 척하는 뜬구름 같은 계획 세우기는 잘했지만, 그건 대학 입학과 독립을 앞둔 고등학생이 멋진 자취방과 장밋빛 대학생활을 꿈꾸며, 들뜬 설렘을 두서없이 노트에 그려내는 몽상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나에게 앞으로 나갈 길이 있기나 했었을까? 나의 삶은 대체로 좁은 선택지에서 그나마 안전한 선택을 했다-라고 요약을 해도 될만하다. 인문계 고교에 진학해, 대학에 들어가고, 전공에 맞는 회사에 입사했고, 하던 일을 거의 그대로 해오는 것이 20년이 되어간다. 다른 면에서 보자면, 대학에 입학한 후 급격히 가세가 기울었고, 즉각적이고 현실적인 수입을 올리기 위해선 배운 것을 사용하는 수 밖에 없었다. 처음 회사에 들어간 이후, 10년 가까이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을 해야 했으니, 섣불리 다른 가능성을 실험할만한 여유도 없었다. 그 와중에 그림 좀 그려보겠노라 발악했던 것이다. 격류 속에서 배가 뒤집히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노를 저었지만, 강줄기만 따라 정해진 방향으로 흘러가는 삶이었던 것이다. 삶에 큰 변화를 주는 선택의 순간이 있었지만, 적어도 커리어에 있어 의미있는 선택과 도전을 해본 적이 없다.
이상, 내가 만화가가 될 수 없었던 내적 부족함과 외적 환경의 기술이다.
현재의 커리어
이제 현재를 이야기해볼까.
대학 전공인 컴퓨터 공학은 적성에 맞는 편이었다. 중고등학교 때에는 별로 배운 것 없이 올림피아드에서 작은 상을 타내기도 했다. 이후 첫 직장 생활도 개발자로 시작했다. 적당히 재능이 있고, 고생도 하고 자잘한 실수는 해도 크게 실패한 적은 없었다. (제대로 된 회사라면 조직원이 실패로 굴러떨어지게 둘리가 없지만서도.) 한국에서는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이직도 했고, 지금은 베를린의 글로벌 기업에서 그럭저럭 허리쯤 위치에서 실무를 하고 있다. 하지만 모로봐도 열정이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커리어와 관련된 공부는 하고 싶어서 한 적이 없고, 소프트웨어 기술을 순수한 마음으로 멋지다고 여긴 적도 드물고, 그렇다고 기업 조직의 위로 올라갈 욕구도 없다.
(그렇다고 스스로를 코더로 규정지으며 내 업무, 내 코딩 이외에 관심을 차단한 적은 없다. 어설프나마 프로덕트와 비즈니스를 이해하려 하고, 조직이 성공하는데 기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며, 하드 스킬과 소프트 스킬을 동원해 최선을 다해 일하고있다.)
딱히 번아웃은 아니지만, 커리어에 열정을 잃어가고 있었다. 현재진형으로 잃어가고 있다. 앞으로 발디딜 곳도 찾지 못했다.
히든루트 - 게임 개발
퍼특 생각이 들었다. 인디 게임을 만들자.
난 게임을 좋아하지만 게임을 개발하고자 하는 욕구는 낮았다. 창작의 관심은 만화에 쏠려 있었고, 크런치 같은 게임계의 기업문화가 꺼려졌다. 하지만 혼자 만드는 저예산 게임이라면 미술적 표현이 필요며며, 커리어에서 쌓은 하드/소프트 기술도 활용할 수 있고, 최근들어 형태를 갖추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욕구도 만족시킬 수 있다. 더구나 회사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한국보다는 적다고는 해도 커리어 연차에 맞는 포지션을 갖춰야한다는 압력이 아예 없지는 않은데, 여기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요즘에는 건강을 많이 해쳐서 매주 5일 매일 8시간 노동과 단속적인 야근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고도 있다.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노동 시간을 줄일 수도 있지 않을까?
조금 설렌다. 어쩌면 창작자의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 히든 루트 하나를 발견한 기분이다. 해피 엔딩일지 배드 엔딩일지 모르지만.
앞날
물론 문제는 많다. 비용, 특히 시간이 적잖이 들 것이다. 프로페셔널한 커리어를 확장하려는 이상 취미로만 삼을 수 없으니 수입을 거둬야 하지만, 게임의 특성상 수입이 일정하지 않다. BM을 다각화하고, 수익성 게임과 작품성 게임의 트랙을 나누고, 건전한 재무를 유지하기 위한 갖은 노력을 해야 할테다. 작품성을 내려놓고 짧은 기간에 수익성 게임을 만들어야 할 수도 있고, 수입 침체기에는 외주나 강의로 수입을 올려야 할 수도 있을테고, 최악의 경우에는 쌓아놓은 저축을 깎아가며 생활비를 마련해야 할 수도 있다.
대충의 커리어 계획은 이렇다. 일단 취미 수준의 작은 프로젝트를 몇 개 진행을 하다, 작은 게임을 출시해본다. 최초 출시품에서는 최대한 에고를 덜어내든지 최대한 에고를 넣든지, 둘 중 하나를 하자. 어중한하게 하지는 말자. 최대한 에고를 덜어낸 게임에서는 대중이 캐주얼하게 좋아할만한 것을 만들되, 작은 BM(아마도 광고)를 포함시킨다. 최대한 에고를 넣은 게임은 사적인 사상이 많이 반영된 스토리 중심의 RPG가 될 것이다. 아직까진 미정. 올해에 어느 스토어로든, 어떤 게임이든, 하나 출시하는 것이 목표다. 현재 7월 말에, 8월이 곧 시작이니, 5개월 남았다.
중요한 조건을 하나 빼먹었던가? 욕구와 다짐으로는 부족하다. 객관적으로 긍정적인 전망을 얻을 때까지는 회사를 다니면서 게임을 계속 만들 것이다. 무엇이 ‘긍정적인 전망’인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기대 연수입과 변동성을 바탕으로 정할 것 같긴 하다.
마음을 다듬어보자. 게임 하나하나의 실패를 두려워말고, 각각의 게임에 너무 큰 목표나 많은 기준을 세우지 말자. 한번 생각이 굳어지면 피드백을 받아들이며 발전하기 어려워진다. 어떤 것을 어떻게 만들지는 언제나 말랑말랑하게 유지하자.
목표는 다른 곳에 필요하다. 인생과 게임개발의 관계를 바탕으로 다각적인 목표를 설정하자. 바로 꾸준히 오랫동안 게임을 만들면서, 깊히 생각하고, 적게 일하고, 적당히 벌면서, 시간과 경제적 여유를 누리며, 주위 사람들과 건강한 관계를 맺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창작의 욕구를 채우는 행복한 삶을 사는 것으로. 하나만 더 욕심을 부리자면, 나의 창작이 세상에 기여가 되기를.
당장
일단 유니티를 다운받고 튜토리얼을 진행하고 있는데, 생각보다 러닝커브가 크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만만찮다. 첫 습작은 빨리 만들고 싶은데, 기능이 다양하다보니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갈피를 못잡고 있다. 가장 간단히 시작할 수 있는 탑다운 RPG 튜토리얼을 찾아서 그대로 따라하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그리고 일종의 일일 작업 일지, devlog를 이 블로그에 남기려고 한다. 대략의 소요 시간과 함께. 그래도 주객이 전도되면 안되니까 로그에 너무 시간을 쏟지는 말자.
Vam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