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량이 과중하다
2022년부터는 자기계발을 위한 시간을 절대적으로 확보하고 싶었다. 굳이 내가 안지않아도 되는 일은 다른 팀원에게 돌리고, 질문과 요청은 적당히만 받고 그 외는 적임자에게 돌렸다. 오전에는 포커스 타임을 갖고 급한 메시지 이외에는 오후에 답변했다. 그렇게 4주를 보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주를 제외한 삼 주동안 심각한 야근을 겪었다. 오전 8시에 일을 시작해서 오전 2시에 끝낸 날도 있다. 단순히 업무량이 너무 많았다. 개인 시간이 적어서 불만이 생기기도 하지만, 정신적으로 지쳐서 할 수도 없는 퇴사를 입에 올릴 정도다.
업무량으로 인한 시간 부족은 두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이미 언급한 자기계발의 곤란함이 첫번째인데, 그 중에서더 영어와 업무 공부를 못하니, 일을 하느라 업무 능력의 개선이 더뎌지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다른 하나는 커리어 트랜지션을 위한 시간 확보가 어렵다는 점이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유튜브를 제작할 여유가 전혀 없다. 마치 함정에 빠진 것 같은 상황이다.
업무량이 적은 회사로 이직하는 것도 방법이긴하다. 회사 LTIP의 인센티브 주식은 2년 후나 확정(vesting)되지만, 그걸 포기한다고 딱히 손해보는 건 아니다. (난 기회비용을 손해로 여기는 계산법을 쓰지 않는다.) 하지만 시니어 직급에 걸맞는 프로젝트 리딩 능력, 특히 영어 의사소통 능력은 여기서 기르고 싶다. 앞으로 1~2년 동안은 이곳에서 버텨야 할 것 같다. 아키텍처, 모니터링, DB 최적화, 등등 기술적으로 아직 뽑아먹을 구석이 많기도 하다.
한국에 돌아가는 것도 가능하긴 하지만, 커리어와 영어 능력 계발, 그리고 이미 납부한 독일 국민연금을 포기해야 한다. 우선순위가 낮은 선택지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라는 커리어는 생업 이상으로 특별하다. 굳이 말하자면 내 인생을을 망치러 온 내 구원자, 랄까. 2004년 겨울은 혹독했다. 아버지는 생활비와 등록금을 보내주기 어렵다고 했고, 그 생활비가 있었더라도 우리 남매는 간신히 월세를 내면서 쌀벌레가 알을 깐 쌀로 밥을 지어먹고 있었다. 나는 겨울방학에 여러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다음 학기 등록금은 커녕 생활비나 간신히 마련할 수 있었다. 낮에는 홀서빙을 했고, 밤에는 초등학교 시험지를 만들었다. 새벽에 멍한 정신으로 몇 시간을 더 잘 수 있는지 계산하며 잠이 들었다. 약한 체력과 많은 업무, 스트레스, 열악한 주거환경과 시원찮은 식사 덕에 몸도 피폐해져갔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고, 나는 막다른 길 같은 절망을 느꼈다. 목을 서서히 조여오는 절망이 아니라, 바로 다음 걸음에 절벽 아래로의 추락이 기다리는 신속하고 절대적 절망! 구체적으로 죽을 생각은 없었지만, 자꾸만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차도로 뛰어드는 이미지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떠올랐다. 그럴 때 벼락처럼 하늘에서 떨어져 나를 구원했던 것이 이 직업이었다. 야근은 많았지만 상관없었다. 내 통장에 찍힌 액수는 기적같았기 때문이다. 150만원! 단순한 알바를 밤낮으로 해야 간신히 월 70만원 정도를 벌 수 있었던 내게, 전공을 살려 잘하는 일로 벌게 된 거금은 아주 각별했다. 이후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각각 원조금을 부치고 월세를 내면, 가끔 밖에서 만원이 넘는 밥을 사먹을 수 있었고, 아주 가끔은 새 옷도 사입을 수 있었다. 급여일이 다가오면 통장의 잔금을 보며 불안에 떨며, 때로는 분노하며, 가끔은 울기도 했지만, 그래도 생존은 위협받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학교로 돌아오기까지 2년을 살아남으며 일했다. 이 일은 그런 일이다.
이제서야 나는 커리어의 변화를 꿈꾼다. 그림을 그리고 창작을 하고, 간단한 코딩도 같이 할 수 있으면 좋을, 그런 일을 하고 싶다. 지금껏 살아온 고된 삶을 거름삼아 이야기를 싹틔워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 그래서 기본기를 쌓고, 개인적인 스타일을 찾고, 매체를 탐색하려는 것이다.
한편으론, 이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야 이론대로 일하면서 한 분야에서 열정적으로 성장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그들이 벽처럼 느껴진다. 이 커리어에서 내 성장의 한계를 느낀다. 오히려 결단이 쉬워졌다. 조건과 기회만 된다면 빠르게 커리어를 바꿀 준비를 미리 해놔야한다. 예로부터 창작자는 투잡으로 시작하기 마련이었다. 재능과 결단과 조건이 특별하지 않고서는.
이런 이야기를 하자, 반려는 내가 이 커리어를 통해 익힌 것들을 소중히 하라고 한다. 내가 생각해도 이 일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나의 상당부분을 빚었다. 일하는 방법, 생각하는 방식, 그리고 세계관까지. 그리고 반려는 일단은 건강해지자고 한다. 그러면 같은 시간도 더 잘 쓸 수 있고, 예상치않게 닥치는 불행도 견딜 수 있을 거라고. 그 말이 옳다.
어찌보면 하루에 한두시간 정도의 야근이 계속되었다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을지 모른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 할 수 있는 걸 한다는 식으로 안이하게 생각해서는 안되겠다. 더 강한 결단과 섬세한 관리, 아직 찾지 못한 선택지를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가장 먼저, 업무량을 현실적인 수준으로 줄여야지. 내일은 스크럼 플래닝이다. 한 번에 원하는 수준에 도달하지는 못하더라도, 내일부터 적극적으로 업무량을 조절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