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의 어휘 공부를 리뷰한다.
블로그에 많은 글을 남긴 것도 아니지만서도, 그 중의 대부분이 영어/영어공부에 관한 것이다. 외국에서 일하면서 영어 실력의 부족에 얼마나 통감하는지, 영어 공부에 얼마나 목을 메는지 쉽게 알 수 있는 지표가 아닐까. 오늘의 주제도 영어 공부다. 이 김에 영어 공부 컨텐츠를 만들어도 되지 않으려나… 싶을 정도.
결과 요약
나는 적잖은 영어 학습 가이드에서 추천하지 않는 학습법을 고수하고 있다. 바로 어휘 암기.
3년 간 매일 10~15분 씩 WordUp 이라는 영단어 암기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했다. 그동안 꽤 많은 단어를 익혔다. 특히 출현 빈도가 10,000 아래에 있는 단어들은 90% 정도는 커버하지 않았나.
https://my.vocabularysize.com/ 에서 테스트를 하면 Vocabulary size는 약 10,800 정도로 나온다. 3년 전의 기록은 없지만, 1년 반 전 쯤에 8,000대 였던 것을 생각하면 상당한 발전이다. 뭐…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다. 이제 웬만한 기술 서적에서는 모르는 단어가 한 페이지 당 0~3개 정도 나온다. 어휘력 때문에 지나치게 방해받는 수준은 가까스로 벗어난 셈이다.
하지만 아직도 멀고도 멀었다. 영어 네이티브 스피커의 어휘 불륨은 대체로 20,000 이라고 한다. 물론 자주 쓰는 단어일 수록 여러 의미와 미묘한 늬앙스가 많아 익히는데 시간이 들고, 낮은 빈도 어휘는 상대적으로 의미가 구체적이라 시간이 적게 든다. 빈도가 낮은만큼 많은 텍스트를 읽어서 종종 뜻을 기억해내야 하는 문제점이 있긴 하다. 하지만 영어 텍스트를 더욱 더 많이 읽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해결될 것이라 본다. 시간과 노력과 운이 뒤따른다면.
효율
앞서 적잖은 가이드에서 어휘 암기를 추천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이유는 다양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암기 대상에 의미부여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는 의미와 감정 등이 함께 묶여있는 것을 쉽게 기억한다. 강렬한 감정을 동반하는 과거의 정신적 외상은 잊기 어렵기 마련이다. 이런 특성을 이용해 기억력대회 선수들은 외워야 할 순서의 카드를 자신에게 익숙한 순서에 대입하여 암기하고, 이후에 익숙한 순서를 떠올릴 때 외운 카드가 자연스레 연상되게 한다. 대화나 책에서 접한 단어는 이후 비슷한 맥락을 당면했을 때 쉽게 연상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당연히도, 능사는 아니다. 책을 읽다 모르는 단어가 나와 사전을 찾아봤는데, 뜻을 보고서야 예전에 봤던 단어였다고 깨달은 일이 많지 않은가? 나만 그런가…? 그렇다면 쭈글…
한편 내가 어휘를 공부하는 방식은 고전적이고, 어찌보면 낡기까지 한 방식이다. 거의 3년 전, 2020년 11월, 난 WordUp이라는 애플리케이션을 유로 구독하기 시작했다. 이 애플리케이션은 무료인 Anki 보다 압도적인 편의성을 제공하지만, 그 핵심 방식은 유사하다. 학습자가 외우고 싶은 단어를 적절한 주기로 노출시켜주는 것이다. 이른바 헤르만 에빙하우스(Hermann Ebbinghaus)의 망각 곡선(Forgetting curve) 이론에 따른 것이다. 말하자면 적당한 주기에 따라 단어를 외우다보면 장기 기억으로 남는다
는 뜻이다. 직관적이고 설득력 있고, 실제로 효과도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의미부여’ 혹은 ‘연상’에 비교해 효율이 낮다고 지적받는 방식이다.
3년을 해보니 확실히 알 수 있다. 내 주민번호나 계좌번호 정도는 단순암기로 외울 수 있지만, 어휘는 그런 방식만으로는 외울 수 없다. 애초에 어휘를 외운다는 개념이 틀렸다. 어휘는 언어의 일부이니 그 의미, 늬앙스, 용례와 함께 익혀야 (습득) 하는 것
이다. WordUp은 다양한 기능을 제공하는데, 풍부한 예시를 텍스트나 비디오로 제공하고, 사전적 의미 뿐 아니라 깊은 의미의 해석도 제공하며, 유의어마저 제공한다. 어휘 암기에 있어서 이만큼 충실한 패키지는 더 없을 것이다.
솔직히 흠잡을 데 없는 구성. 피할 수 없는 자잘한 흠 (버그라던지...) 정도로는 아무 악영향이 없다.
3년 간 거의 매일, 하루에 10분에서 15분을 이 앱과 함께 암기에 메달렸는데, 그 효과는 어느 정도일까? 어휘 습득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봤을 때, 10점 만점에 7점이다. 나쁘진 않지만, 이걸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애플리케이션에 모자란 점이 있을까? 그렇진 않은 것 같다. 잠깐, 왜 앞서는 어휘 암기라고 하다가 이번 문단에서 굳이 어휘 습득이라고 썼지? 궁극적인 목적은 습득이고, 암기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WordUp은 암기를 돕는 도구로서는 훌륭하지만, 암기만으로는 습득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앞서 언급한, 충분하지 않다
의 의미가 이것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WordUp은 단어에 의미부여를 할만한 다양한 자극을 제공한다. 의미, 늬앙스, 용례를 학습만한 다각적인 전술을 사용하는데, 어째서 습득에 충분하지 않은 걸까? 이 점을 세부적으로 다룰 수도 있겠지만, 인간은 맥락 속에서 잘 학습하기 때문
이다. 축구 연습을 아무리 해도, 경기를 뛰어봐야 비로소 축구를 할 줄 알게 되는 것이다. Wordsmart 같은 책이나 영어 단어장 같은 걸 아무리 붙들고 있어도, 좋아하는 책을 읽고,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고, 친구에게 말해봐야 비로소 어휘를 습득하는 것이다.
인풋 가설(Input hypothesis)로 유명한 Stephen Krashen도 재미있는 책을 정신없이 읽는 것이 최선의 언어 학습법이라고 말한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도 그렇다. 암기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머리 주변을 희미하게 유령처럼 부유하는 단어들이 많다. 그러다 언젠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다가 그 단어를 발견했을 때, 마치 두개골과 뇌장벽을 통과해 뇌의 장기기억 영역으로 스며드는 것 같은 체험을 한다. 뉴런과 뉴런이 새로운 연결을 만들면서 뉴런 다발에 단어의 복합적인 의미, 늬앙스, 용례가 내려앉는 것이다. 난 언제나 그 기분을 즐긴다. 몰입 속에서 그림을 그리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며 새로운 표현이 떠오르는 순간, 지친 몸으로 긴 하이킹을 이어가다 갑작스레 마음에서 예전에 몰랐던 고요함이 솟아오를 때, 어려운 책을 읽다 난데없이 통찰이 번개처럼 내려칠 때, 자아와 욕구가 희미해지고 머리가 맑아지고 세상이 이해되는 듯한 쾌감이 산들바람처럼 불어온다.
어쨌든, 무엇을 배우든, 암기한 것은 사용해야만 제대로 익혀진다는 이야기는 당연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이다. 굳이 길게 글로 남기는 이유는, 단어 암기에 몇 개월을 집중하고, 이후에 독해를 하는 식의 방법론은 결코 좋은 길이 아니라고 확실히 못박기 위해서다. 어떤 분야에서든, 초급만 넘어서면 여러 방법론을 조합해서 함께 수행하는 것이 보통이다.
다른 질문이 남는다. 암기가 굳이 필요할까? 다독을 하면서 그때 그때 모르는 단어를 마주칠 때마다 사전을 찾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이 질문에 관해서는, 학습자의 기억력, 목표, 읽기 능력 등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나는 평균 정도의 기억력을 가졌고, 시간적 여유를 봤을 때 다독이 어려운 상황이며, 네이티브 수준의 읽기 능력을 갖추고 싶다. 그런 면에서 여러 방법론을 조합해 효율적으로 학습을 수행하면서 높은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최적이다. 이것이 나의 답이다.
사족
한가지 더, 학습 효율에 있어 인출 전략도 중요하다. 그 중에서도 가르치기가 훌륭하지만, 이것은 나의 처지를 비춰봤을 때, 최소한 영어에 있어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 시점에서 내가 효율의 이야기를 안할 수가 없는 이유는… 영어가 주 언어인 회사를 다닌지 4년인데 아직도 영어가 부족하다. 곧 커뮤니케이션이 더 잦은 포지션으로 승진을 해야 하는데, 걱정이 태산이다. 하지만 약간의 리스크를 유지하면서 도전을 계속해야 성장을 이어갈 수 있긴 하지.
다른 느낀점
비슷해서 헷갈리는 어휘
스펠과 발음이 비슷해서 계속해서 헷갈리는 단어들이 있다. 하물며 어떤 것들은 발음이 동일하다! 현실에서 부딪혀가며 맥락을 바탕으로 이해하게 되는 수 밖에 없다.
가끔씩 빡쳐서 적어놓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 가끔씩 정리한 것만 해도 이 정도이다.
gleam, glisten, glint, glean frantic, fanatic, frenetic bail, bale, vail, veil, vale pester, pastor sundry, sultry epitaph, epithet bridle, bristle, brittle content, contend horde, hoard guerilla, gorilla coarse, coerce heist, haste rabble, revel, rebel, ravel slender, slander snub, snob swirl, swill illegible, eligible resent, regent, recent
좋아하는 어휘
아래는 다른 곳에서 보거나 듣지 않았어도 어쩐지 애정이 가는 단어들이다. 덕분에 단어 암기와 예시만으로도 쉽게 습득했다. 이것도 전체 리스트는 아니고, 가끔 생각날 때마다 정리한 것이다.
acuity
- 사고·시각·청각의 예리함
benign
- 유순한
dabble
- 취미 삼아 조금 해보다
- 손·발 등을 물에 담그고 첨벙거리다
eaves
- 처마
indigenous
- 원산의, 토착의
orchard
- 과수원
raconteur
- 이야기꾼
retaliate
- 보복하다
reciprocate
- 되받아치다, 화답하다
seclusion
- 호젓함
swill
- 흐르는 물이 씻다
tranquility
- 고요, 평온
underpin
- 보강하다
undermine
- 약화시키다
waddle
- 뒤뚱뒤뚱 걷다
wade
- 물을 헤치며 걷다
wobble
- 뒤뚱거리다
- 동요하다
또 사족
점점 글이 재미없어지는 것 같다. 글쓰는 솜씨도 퇴보하는 것 같고. 요즘에는 시간이 없어서 책을 읽는 시간도 적고, 뭐든 쓰고 싶어도 그냥 넘어가는 일이 많은데, 더 읽고 쓰고싶을 때마다 써야겠다
. 앗… 입력과 인출, 의미부여까지 한 문장에 다 들어있네. 이것 봐. 이미 답은 알려져 있어. 지름길로 가려다 길을 잃을 뿐이지.
결론
단어 암기는 계속한다. 다만, 많이 읽어야 한다. 지금의 독서량으로는 턱도 없으니, 더 많이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