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멜랑콜리
1. 연말 멜랑콜리
연말을 맞아 에세이를 쓰기로 했다. 이것은 좌절에 관한 글이다.
특별히 이번 연말에 좌절할만한 일이 있던 건 아니다. 매번 한 해가 끝날 무렵이면 난 좌절에 젖는다. 지나간 한 해를 뒤돌아보며 내가 이루고 싶었던 심플한 목표들 중 무엇을 얼마나 이루었는지 살펴보는데, 그 과정이 썩 즐겁지는 않다. 그 목표 하나하나가 원대한 것도 아니다. 운동으로 체중을 늘리고, 영어의 수준을 끌어올리고, 여행이 가능할만큼의 독일어를 익히고, 머신러닝을 공부하고, 뭐, 이런 소소한 것들이다. 책을 낸다거나, 집을 산다든지, 타국으로 이민을 간다는 것에 비하면 -작다고 하긴 뭣하지만- 어떤 면에서 아득히 다른 것들이다. 그도 그럴 듯이, 나의 매년 목표는 운동과 공부에 국한되어 있고, 측정이 용이하고, 운의 도움 없이도 나의 노력으로 될만한 것들이다. 하지만 주위 환경은 내 기대를 따라주지 않고, 내 산만하고 약한 정신은 계획을 잘 따라가지 못한다.
사실 이번 연말이 어떤 면에서는 특별하긴 하다. 몇 개월만 지나면 내가 독일에 온 지 5년이 된다. 독일에 올 무렵, 약 5년 전에는 지금쯤이면 삶의 큰 결정을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독일에 눌러 앉을지, 한국에서 살 지, 개발자 커리어를 유지할 지, 다른 직업으로 전환할 지, 이런 것들 말이다. 하지만 아직 아무 것도 모르겠다. 뭐든 결정을 하려면 어떻게든 시도해보고 가시적인 결과를 척도로 활용해야 하는데, 이렇다할 가시적인 근거가 아무 것도 없다. 물론 영어로 대화하며 최신 기술과 개발 방법론을 추종하는 회사에 다니며 배운 건 많지만, 아직도 나는 어떤 결정도 할 수 없다. 몇년동안 내가 해야 하는 건 그저 “계속 시도해보기” 뿐이다.
특별하다기 보단, 시간의 가속이 실감나는 해이기도 하다. 10년 전 무렵, 갓 삼십대에 접어드는 또래 친구들이 복잡하고 멜랑꼴리한 심정을 토로하곤 했었다. 당시의 나는 뭐가 그리 오만했던지, 그런 기분은 “사회와 미디어가 만들어낸 집단적 환상”이라 치부할 뿐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어쩌면 나야말로 그 집단적 환상에 빠져버렸는지 모르겠다. 얼마 남지 않은 내 나이, 만 마흔이 다가오는 것이 어째 좀 싫은 것이다. 시간이 흐르는 것은 자연현상이니 멈출 수도 없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감정을 두는 것이 다소 무의미하기는 하다. 그러니 추상적으로 시간과 나이를 탓하는 것을 멈추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마흔 쯤이면 막연히 뭔가 해냈을 줄 알았던 자신에 대한 실망을 느낀다. 인류는 십진수를 사용하니 십 단위마다 뭐든 의미를 두고 싶어하는 것이 문화적 습성이라고는 하지만, 그걸 알고서도 실망과 답답함을 떨치긴 쉽지않다.
복잡한 생각의 타래에서 몇가닥만 건져서 펼쳐보면 대강 이렇다. 난 이미 개발자의 커리어에서 한계를 느끼고 있는데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커리어를 막는 큰 원인 중 하나는 영어로 하는 의사소통의 능력의 모자람인데, 영어가 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충분하진 않다. 이걸 어떻게 해야지? 가능하다면 내가 지닌 다양한 능력을 종합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창작을 하고 싶은데,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지? 모두 의문문이네. 머리가 복잡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따지고보면 여기저기 꽤나 기웃거리면서 살아왔다. 만화가는 오랜 꿈이었고, 게임을 만들고 싶기도 했다. 그림 좀 배워보겠다고 미술학원과 강의나 모임도 들었었다. DSLR이 한참 인기일 때 내 손에도 카메라 하나가 들려 있었다. 급조한 밴드의 객원 보컬로 작은 공연도 했고, 속성으로 사물놀이를 배워 무대에 서기도 했다. 기타를 네 다섯 대 정도 사면서 재능 부족을 절감하기도 했다. 흠… 정작 지금 내 목에 풀칠해주는 생업 기술에 소홀히 한 감이 있네.
이렇게 뒤를 돌아보는 게 좋다. 좌절감에 젖어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지만, 다시 어깨를 펴고 걸음을 떼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직도 뒤돌아보기는 끝나지 않았다. 오늘은 좀 지쳤으니, 남은 생각은 다음 글에 남겨야지.
ps. 글쓰기가 쉽지않다. 부추겨져서 그런 것일까, 누군가 읽을 것을 의식해서 그런 것일까, 말을 꾸미려고 해서일까. 이 글이 솔직한 거친 속내가 아니라는 뜻일까? 어쩌면 캐내야 할 이야기지만 선뜻 드러내기 꺼려하는 내용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남은 생각은 조만간 토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