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사우나 방문기
성별불문의 성인들이 알몸으로 거리낌 없이 배회하지만 타인에게는 눈길 하나 주지 않는 곳, 바로 독일의 사우나다. 오늘은 베를린에서 가장 큰 사우나인 Vabali에 다녀왔다. 발리를 모티브를 삼은 건축과 인테리어는 감탄스럽게 아름다웠다. 일단 규모가 상당해서, 최대 6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적재적소에서 제기능을 다하는 여러 컨셉의 사우나, 다양한 형태의 휴식 공간, 정원, 식음료 시설 등의 구성은 훌륭했다.
베를린의 사우나에서는 사우나에서는 모두가 알몸을 드러낸다. Vabali 역시 사우나와 수영장에서는 몸을 가리지 못하며, 이외의 공간에서는 로브나 타월로 몸을 가리는 것을 권한다. 하지만 다른 사우나와 비교해서도 이곳 사람들은 훨씬 몸을 가리지 않는다. 물론 사우나에서 나오기만 해도 몸을 꽁꽁 싸매는 사람도 있지만, 어느정도 짬이 차오른 사람들은 어디에서든 맨몸을 드러내고, 아예 수건 하나 들지 않고 시설 내 정원을 산책하기도 하며, 선베드에서 몸을 가리지 않은채 잠을 청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자연주의, 독일식 표현으로는 FKK이다.
실제로 여러 사우나를 오가면서 사우나 후에 반복적으로 샤워를 하는 와중에 로브를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하다보니, 점점 귀찮아지다 현타가 오는 시점에 도달했다. 결국 우리는 -남들처럼- 사우나와 샤워부스 주변에서는 타월로 몸을 가볍게 가리는 것조차 포기하게 됐고, 그런 채로 점점 여기저기를 활보하게 되었다.
가끔씩은 좁은 공간에 샤워를 하러 한번에 몰려들어 혼잡이 생기기도 한다. 웬만한 공간에서는 몸을 가리지 않게 된 시점에서도 샤워를 위해 줄을 서거나, 혹은, 칸막이 없이 옆으로 나란히 서서 샤워를 할 때쯤에는 이성의 존재가 조금 부담스러웠다. 그럴 때마다 부담스러워한 게 민망해질 정도로 제 할 일만 하고, 지하철에서 마주친 행인만큼의 관심도 주지 않고는 제 갈 길을 갈 뿐이다.
몸의 위협을 느낄 일이 적은 남자인 나에 비해 시간이 더 들었지만, 아내도 금새 어색함없이 분위기에 적응했다. 다만, 우리 둘 모두 동북아시아인을 마주칠 때마다 마음 속에 얼룩처럼 번지는 불편함을 느꼈다. 우리가 속해있던 문화권의 관념관습이 불쑥 튀어오르는 것이다. 숨이 턱 막히는 놀람, 가슴 갑갑한 불안과 같은 것들. 습관화된 터부의 감각, 몸을 드러낼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이 의식 저 아래 뿌리 깊게 박혀있다. 퍼특 이런 생각이 든다. 언감생심- 전파는 상상도 할 수 없지만, 과연 독일 수준의 누디티에 관한 문화가 동북아시아에 ‘문화 다양성’ 정도로는 인식될 수 있을까? 가까운 미래에는 이뤄질 것 같지 않다. 그런 날이 올까? 언젠가 그 정도 이해에는 도달해야 할텐데.
성별이 다른 젊은이에서 노인들이 한데 섞인 이 공간에서 모두가 알몸이면서도, 어떻게 이토록 안전을 장담하며 태연할 수 있는 걸까? 이럴 때마다 오랫동안 머릿 속 깊히 박혀있던 생각을 하게 된다. 때로 우리는 예술을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들면서, 몸은 야하지 않다는 식으로, 에로스 없는 “아름다운 몸”을 이야기한다. 반면, 어느 예전에 읽었던 누드모델의 인터뷰에서는 벗은 몸이 야한 것이 당연하다는, 마치 선언과 같은 발언이 있기도 했다. 나에게 둘은 그다지 모순적이지 않다. 다만 살짝만 시각을 바꾸면 -철컥-하고 입체 퍼즐이 맞춰지듯 서로 들어맞는 이야기다. 몸은 에로스의 가능성을 내제하지만 몸은 에로스 그 자체가 아니며, 성폭력을 부르는 자석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쥐고 휘두를 주먹이 있다해도 문명 사회에서 폭력은 드물게 발생하듯 말이다. (뉴스와 소셜미디어 말고, 우리의 평범한 현실 속의 가능성 말이다.) 그렇다면 몸을 억압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음험한 페티시즘과 성폭력, 즉 가해자의 가능성 때문에 피해자의 몸을 억압해야 하는가?
인간을 옥죄는 거대한 억압 하나를 벗어재낀 후에 우리가 본 것은 무엇인가? 하나는 성적수치심이란 몸의 주인에게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몸을 대상화하는 시선과 생각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즉, ‘부끄러우니까 몸을 가려야한다’는 명제는 세상에 만연한 폭력에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하는 오래된 억압인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자유를 얻어내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이다. 여전히 세상에는 성폭력이 만연하고, 우리가 거리낌 없이 나체가 될 수 있는 공간은 작디 작은 점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다는 이야기가 쓰여진 이후로 (어쩌면 그 이전부터도 이 이야기와 비슷한 얼개의 인식은 세계 어디에나 있었을 테지만) 이런 자유를 누릴 공간의 확보는 인간으로선 어마어마한 성취라고 확신한다. 성별의 분별이 있는 문명권 중, 이런 특이성이 발현될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더 있을까? 마지막 하나는 사실, 이곳을 벗어나서야 다시 상기하는 되었다. 옷은 실용적 또는 사회적 이유로 입긴 입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만 필요를 인식하고 입는 옷은 막연한 두려움을 이유로 입던 옷과는 다르다.
사우나 전문가의 Aufguss, 공공 공간에서 생애 첫 알몸 수영, 발리 스타일 방갈로에서의 망중한 등, 이 하루에 새로운 경험이 많았다. 수백명의 몸을 보며, 기성의 미추 기준을 넘어서는 다양한 몸, 모든 몸의 아름다움이 청사진처럼 어슴프레 마음에 새겨졌다. 어둠이 내리깔리는 하늘 아래에 조명이 켜지며, 야외 조명, 수영장, 실내, 정원, 방갈로 등이 빛과 어둠에 어울려 마치 동화 속에나 있을법한 초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엮어내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 시설 이용에 관한 몇 가지 전략을 생각해 보았다. 되도록 로브와 타월은 가져갈 것- 대여료도 아깝지만, 임대 로브는 다 똑같이 생기다보니 누가 내 걸 입고 가는 일이 있었다. 결국 못 찾음. 물통은 사람 머릿수대로 챙겨갈 것. 땀을 흘리다보니 수분을 보충해야 하는데, 돈주고 음료를 계속 사먹는 것도 한계가 있다. 급수대는 무료다. 선글라스도 챙길 것. 평범하게 햇볕 아래에서 휴양지를 즐기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이번처럼 책이나 이북을 꼭 챙길 것. 자주 짧은 시간 이용하기보다는, 가끔씩 하루 종일 머무르는게 비용면에서는 더 나은 것 같다. 아직 식사에 관한 전략은 없다. 사먹으면 비싼데 음식 반입은 금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