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살을 목전에 두고 있던 2004년의 겨울부터 생존에 매달려왔다. 말 그대로, 다음 달에 먹고 살 것을 이번 달에 수확해야 하는 삶이었다. 통장 잔고를 계산하며 다음 달 월세와 식비, 그리고 부모님께 보낼 돈을 생각하면서 한숨과 안도를 반복하는 삶이었다. 2014년, 입사한지 얼마 안된 회사의 합병과 연말 평가를 거치면서 연봉이 올랐는데, 내 수입은 “생계걱정”을 넘어 “여가가능”으로 뛰어올랐다. 분투는 끝이났다. 차도 사고, 공간이 여유로운 집에서 살면서, 해외여행도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계에 대한 불안을 떨치지 못했다. 난 수입을 전적으로 월급에 의존하고 있었다. 회사를 나가는 순간 다시 20대에 겪은 깊은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공포심은 내가 미래 계획을 짜는 프레임을 크게 좁혔다. 징검다리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애쓰는 보수적인 경제활동 이외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다 지금에 이르렀다.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결정적 계기는 질병을 핑계삼아 회사를 그만둔 것이었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이 사그라들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도전이다. 연금저축 IRP도 있고, 소액의 개인연금도 있고, 한국과 독일에서 취사 수령 가능한 국민연금도 있고, 아직 그다지 크지 않은 Corporate Pension(bAV, Betriebliche Altersvorsorge)도 있다. 이대로 잘 굴리면 노후에는 큰 무리가 없다. 하지만 몇 개의 연금 계좌가 내 불안을 잠재우진 못했다. 안정의 가장 큰 원천은 처가의 존재이다.

반려는 92년생이고, 올해 만 34세이다. 내가 불안에 떨며 보수적인 앞날을 그리고 있으며 독일행을 결정했을 무렵의 나이에 아내는 박사 논문을 쓰고 있다. 힘든 일이다. 나를 만나기 전에는 불안을 이기지 못해 자신을 추스리러 휴학을 했고, 이억만리 타지에서 돈을 벌어가며 학업과 생계활동을 병행해야 했다. 당시 처가는 현금 융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반려도 크게 의존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 나를 만나 생계의 고민을 덜고 공부와 연구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혼인하고 몇 년에 걸쳐, 나는 지독한 불면에 시달렸다. 이유가 있던 불면은 이제 습관이 되었다. 대체적인 이유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다. 지나온 생계의 불안을 반려에게 피력했고(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다는 말을 쓰기는 쉽지 않다. 대화를 하다보면 피력하게 된다.), 반려는 자신의 집안을 언급하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반려에게 안정을 준 것이 그대로 돌아왔다. 나는 시간을 들여 그걸 내제화했다.

처가는 넉넉치 않은 현금 흐름과 무거운 대출 상환을 양 어깨에 짐처럼 지고 있지만, 자산을 바탕으로 씩씩하게 은퇴 생활을 누리고 있다. 웬만한 악재가 닥치더라도 노후를 살아낼 수 있는 경제력이다. 나의 부모에게 했던 것과 다르게 금전적인 지원이 필요없다. 더구나 일시적인 현금 고갈에도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식에게는 뭐든 주려고만 하는 것이 그분들의 마음이다. (쓰다보니 그분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덕분에 내가 부모님에게서 얻었던 경제적 부양의 관념을 상당히 씻어버릴 수 있었다. 최근 몇년에 걸쳐 처가의 재산 내역을 천천히 윤곽잡아왔다. 올해는 내가 가진 -상대적으로 초라한- 자산 현황을 처가에 알렸다. 우리는 일종의 경제 공동체 속에 얽힌 주체들이라는 감각이 더 선명해진다.

최근 한국 방문에서 나의 사업계획을 처가에 알렸을 때, 장모님은 격려와 기대를 보여주었다. 스트레스로 몸이 아플 일은 하지 말고, 자신의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라고. 건강과 경제력. 내가 분투하며 얻으려 해 온 대상들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내가 원하는 삶을, 반려와 함께 다소 높은 목표를 좇고 싶었다. 긴 생계와 부양의 생애가 내 발목에 채운 족쇄가 풀리는 것 같았다. 나는 마음으로도 물질로도 지지받고 있구나. 이제 나만 도약에 성공하면 되겠구나.

오늘은 아내와 장모님 사이에 말다툼이 있었다. 나는 장모님께 전화를 걸어 한 시간 가량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맞장구를 쳐드렸다. 매일 할 수는 없지만, 큰 짐 하나를 치워주신 은혜에 대한 내 나름의 작은 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