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공부 회고 - Comprehension is King
오랜만에 내 영어공부에 관해 종합적인 회고를 해보고자 한다.
어휘
https://my.vocabularysize.com/
최근 몇년간 위 사이트에서 어휘 볼륨을 체크해왔다. 지금도 막 해봤는데, 15,200 정도가 나왔다. 언어군(Word Families), 즉 뻔한 파생 단어를 제외한, 일종의 어근이 되는 단어를 15,200개 정도 익히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근사치에 불과하지만.
15,200이라는 숫자에 관해 감을 잡으려면 과거를 돌아봐야겠지? 본격적으로 각 잡고 기록을 남기면서 어휘공부를 시작한 건 2020년 하반기였던 것 같다. 그러고 2020년 11월에 WordUp을 시작했다. 그 때 이후로 거의 매일 머릿속으로 어휘를 쑤셔넣어왔다. 물론 학습 강도에는 기복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어휘 테스트의 기록이 촘촘히 있는 건 아니다. 제대로 시작한 이후의 기록은 아래 정도만 남아있어.
- 2021년 초 : 8,000
- 2023년 10월 : 10,800
- 2026년 5월 : 15,200
매년 최소 1천 단어 정도를 꾸준히 늘려온 셈이다. 성장 추이는 알겠지만, 이 숫자의 의미를 알기 전까지 뿌듯해하기는 이르다.
Vocabularysize가 Nation의 연구를 기준으로 삼는 것 같아서 클로드에게 Nation 연구의 기준에 대해 물어봤다. 그 대답은 아래와 같다.
- 3,000 : 일상 구어 대화의 약 95% 커버
- 8,000–9,000 : 소설/일반 텍스트를 사전 없이 읽는 데 필요한 수준 (98% 커버, 소위 comprehension threshold)
- 17,000–20,000 : 교양 있는 원어민이 수동적으로 인지하는 범위
시간이 걸리지만 교양있는 원어민 수준에 가까워지고 있다. 한가지 참고해둘 건, 바로 윗 줄에서 “수동적으로 인지”라는 부분인데, 그건 인식할 수 있는 수용 어휘(receptive vocabulary)와 사용할 수 있는 생산 어휘(productive vocabulary)가 다르기 때문이다. 조금 더 빠르면 좋겠지만 뭐 어때. 만족스럽다.
그런데 내 듣기 능력은 영 별로인거지? 어휘는 원어민 언저리까지 왔는데 정작 귀는 그만큼을 못 따라온다. 지금껏 들인 시간을 생각하면 당황스럽고 좌절스러울 때도 있다. 여기에 대해서 생각을 전개해보자.
Listening
세상엔 들을 것이 많다. 팟캐스트, 유튜브, 영화, 시리즈, 강의/강연, 등. 그리고 무엇보다 대화.
작년 10월에 회사를 그만 둘 때까지, 만 6년 동안 듣기 능력에 대해 자신에게 불평을 하고 실망도 많이 했다. 어쨌든 가벼운 일상 회화는 할 수 있었지만, 여태껏 조금이라도 빠르거나/길거나/유추가 필요하다면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논리적인 유추 뿐만 아니라, 농담 같은 경우도 그렇다. 표면 아래의 내용을 이해해야 듣고 웃을 수 있는데, 알아듣지 못한 농담에 남들이 웃고나서 한 박자 늦게 따라 웃는게 얼마나 허탈한지 모른다.
가만히 스스로를 관찰해본 바, 내가 영어 스피킹을 들을 때에는 다음과 같은 패턴이 있었다.
- 엉성하게 들은 것을 조합하면서 유추하는데 온 정신이 팔려있다.
- 소리를 놓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애초에 수음을 어느정도 포기한다.
- 그러다보니 유추에 더 많은 힘을 써야만하는 악순환의 고리이다.
- 필연적으로 대화의 내용을 늦게 따라가게 되고, 전체적인 이해도가 낮아진다.
이건 영어 경험이 적은 어린 시절, 영어 듣기평가를 하면서 어떻게든 점수를 내려고 만들어낸 처리과정과 비슷하다. 그러다 지금까지도 영어 소리를 감각하는 능력도 모자라고(내 귀는 영어 모음 구분조차 제대로 못한다), 읽는 것 듣는 것 할 것 없이 이해 속도마저 느리다보니 이런 악순환에 걸려있었다. 일상 회화야 워낙 반복적으로 해오다보니 숙달이 되었다 쳐도, 익숙하지 않은 소리와 내용이 대화나 회의에 등장하면 그때부터는 블랙아웃이었다.
Intensive Listening
올해는 시간이 날 때마다 공각기동대의 옛적 TV 시리즈인 Stand Alone Complex의 영문 더빙판으로 Intensive Listening 훈련을 했다. 내용을 이해하는데는 문제 없지만 전혀 안들리는 것이 많았다. 그걸 전부 알아듣는 것이 내 목표였다. 하지만 20분 남짓한 러닝타임 내내 Intensive Listening을 할 순 없었다. 애초에 30초~2분 정도의 짧은 오디오를 반복해 들으며 깊이 파들어가는 방법론이 아니던가. 처음에는 스크립트도 없이 받아쓰기를 하고, 알아듣지 못한 것들을 모두 노트에 정리해나갔다. 그러나 반절을 넘어가면서 이내 Intensive를 포기했다. 그렇다고 바로 Extensive Listening 처럼 편하게 듣는 것까지는 아니었다. 일종의 Intensive-like Listening이라고 할까? 결국 하나에서 열까지 받아쓰는 건 그만뒀지만, 들리지 않는 부분은 빼먹지 않고 다시 들어보고,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건 스크립트를 짚어가며 단어 하나하나 모두 익혔다. 학습 효과는 크게 떨어지지 않으면서 인지적 부하를 상당히 덜었다. 클라이막스의 3~4 회차에서는 대사의 양과 난이도가 확 늘어서 고생을 좀 했지만 무사히 끝냈다.
+ 꽤나 오래 전, 언젠가는 자막없이 이 영문 더빙 애니메이션을 시청해야겠다는 야망을 품었었다. 이걸 해내는데 10년도 더 걸린 셈.
Extensive Listening (+ 약간의 Intensive)
컨텐츠 하나를 깊게 파는 건 좋은 훈련이었지만, 시간 투자와 정신력 소모가 상당해서 지속가능성이 낮다. 실제로 한국에 다녀오느라 맥이 끊긴 이후에는 한참동안 재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앞으로는 러닝타임 10~15분 정도의 흥미로운 팟캐스트 에피소드를 매일 들으려 한다. Extensive Listening에 중심을 두어 부담을 줄이면서 인풋은 늘리되, 안들리는 부분 중 일부를 뽑아 Intensive하게 반복하는 식으로 두 방법론을 양립하는게 좋겠다.
발음 교정 - 발음 교정 이상의 효과
올해는 BoldVoice라는 앱을 통해 발음 교정도 시작했다. 발음 교정은 그 효과가 발음에 그치지 않는다. 내가 그동안 오해했던, 영어의 소리가 어떻게 나는지의 이해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i/ɪ, u/ʊ의 차이를 알게 되었고, z/ʒ/tʃ/dʒ 같은 자음들이 어떻게 발음되는지 알았다. 듣다보면 알게될 거라는 생각은 얼마나 순진했나. 소리에 대한 이해가 늘어나니 듣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음소 하나하나가 더 잘 들린다. 예전엔 두루뭉술하게 듣고 말하며 넘겨왔던 단어 하나하나의 발음을 새롭게 인식하는 중이다.
현재 거의 5개월째 연습 중이다. 많이 개선되었지만 아직도 어려운 것들이 많다.
긴 시간 만만찮은 노력을 들였다. 뉴스 정도에서는 연음, 음소, 단어 하나하나가 깨끗하게 들린다. 단어나 표현이 아주 낯설지 않으면 웬만해선 소화 가능하다. 그렇다고 듣기 능력의 단단한 베이스라인이 높아졌다기보단, 귀의 예민함이 일시적인 모멘텀을 받은 상태가 아닌가 싶다. 이럴 때 꾸준함을 유지해야 한다.
Comprehension
내 Listening에 문제가 있던 건 사실이다. 지금껏의 전개를 보면 가장 큰 문제가 Listening Comprehension라서 거기에 집중했다고 읽힐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다. 유심히 들여보면 읽기나 듣기를 가리지 않는 일반적인 Comprehension 역시 내 모자란 Listening Comprehension에 크게 기여한다. 여기서부터는 흐름을 비틀어서, Listening 뿐만 아니라 일반 Comprehension에 대해 논해보자.
단어도 알고, 문법도 알고, 문장의 해석도 잘 되는데 말이지. 국어만큼 뉘앙스가 섬세하게 와닿거나, 문장 하나하나가 문맥 속에서 선명하게 이해되거나 하질 않는다. 때로는 영어로 생각하는 뇌의 회로가 국어보다 미성숙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끝내 한국어-영어의 번역경로가 꺼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하나- 언어의 숙련도를 가늠짓는 것 중 하나는 예측이다. 읽기와 듣기가 마찬가지로 예측이 중요하고, 예측을 위해선 경험이 필요하다. 읽는 경험, 듣는 경험, 말하는 경험, 그리고 상황에 따라 대화하는 경험도 중요하다. 너무 좌절할 필요는 없다. 이런 일은 너무나 잦은데, 그때마다 좌절하면 전진할 수 없다. 하나의 분명한 입장을 원하는 뇌에게는 “실패는 배움의 기회”라고 설득하는 수 밖에.
인풋 - 깊은 읽기와 더 많이
해야 할 것이 달라지진 않는다. 전통적이고, 잘 검증된 Comprehension 향상법은 많이 읽는 것이다. 한동안 영어 책이나 글 읽기를 꾸준히 했는데, 최근들어 흐름이 끊겼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유튜버 돌콩이었나? 자신이 한창 영어공부에 몰입할 때는 책을 붙들고 읽으면서 필사하고 달달 외우기까지 했다고. 왜인지 알 것만 같다. 읽는 것을 익히려면 꽤나 깊이 읽어내야 한다. 글 전체의 문맥과 문장의 상호작용을 감지해야 한다. 더 깊게는 문장의 구조, 문단 속의 문장 배치, 어휘의 뉘앙스, 문장들이 만드는 호흡 같은 것도 파악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읽으면서 앞으로 나올 글을 예측하고, 독자의 독서 경험에 빗대 글의 구조나 대강의 의미를 밑그림처럼 구성하고, 읽지 않은 단어까지 무의식적으로 메꿔놓기 때문이다. 그래야 느리지 않으면서도 충분한 내용 숙지가 가능해진다. 글을 읽든, 대화를 하든 마찬가지다. 대화 뿐 아니라 마주한 사람의 얼굴을 읽어내는 중에도 인간의 뇌에선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그러니 지금 읽는 부분만이 아니라, 맥락과 흐름, 그리고 문법과 구조를 잘 의식하며 읽어야 한다.
하지만 하나의 툴, 하나의 영역의 훈련은 효과가 떨어진다는 걸 기억하자.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강도 높은 Intensive Listening은 결국 Extensive-Intensive의 균형으로 수렴했다. 깊이 읽기에만 집중하며 지나친 인지적 부하를 계속하다보면 결국 지치게 되고 학습의 단절로 이어질 수도 있다. 언어의 체화는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노출로 숙련도가 향상된다는 걸 명심하자. 그러니 너무 무리하진 말고, 깊이 읽기와 적당히 즐기는 독서의 균형을 잘 잡는 것이 좋다.
+ 작년에는 James and the Giant Peach와 Winnie-the-Pooh를 읽었다. (한 권의 책이 아닌 Pooh 시리즈가 있다는 건 지금 막 알았다.) 옛날부터 쉬운 독해는 동화책부터 시작하라고 들었긴 했지만, 나이가 들어서 읽으려니 이거 생각보다 재미가 없다. 반면, 야생동물의 광견병 예방에 관한 다소 긴 글(4000자 이상)을 읽을 때는 생각보다 술술 읽히는 걸 넘어 빨려들듯이 몰입해서 읽었다. 예전에 Douglas Lee 할아버지에게 받았던 The Economist의 글을 읽어봤는데, 기대 이상으로 쉽게 읽혔다. 흥미와 난이도는 상호작용한다. 재미있으면 덜 어려워진다.
쓰기 - 인출 - 이해
성인이 익숙치 않은 언어로 깊이 읽어내는 것이 어디까지 가능한가? 나는 한계를 느낀다. 영어로 글을 읽으면 내용이 깊숙이 와닿지 않는다. 단어 하나하나의 뉘앙스까지 찾아가며, 한 문장을 여러번 읽고, 글을 앞뒤로 다시 읽으며 흐름을 재탐색해도 내용이 와닿지 않아. 가끔씩은 절망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다가 번역본을 찾아 읽으면, 또는 AI에게 직역을 시켜서 국문으로 읽으면, 흐린 눈이 갑자기 맑아진 것처럼 머릿속이 트이는 경험을 한다. 얼핏 생각하면 당연한 것도 같지만, 당연하다고 그냥 두면 안된다.
잠깐 옆길로 새볼까? 어린 아이라면 모국어 독해력을 향상시키는 과정이 상대적으로 쉬울 것이다. 신생아는 뉴런의 대부분을 이미 갖춘 채 태어나며, 출생 직후부터 몇 년에 걸쳐 뉴런 간의 연결인 시냅스가 폭발적으로 과잉 생성된다. 어린 시절의 학습은 이렇게 과잉 생성된 연결 가운데 자주 쓰이는 것은 강화하고 쓰이지 않는 것은 솎아내는, 이른바 시냅스 가지치기(synaptic pruning)의 과정이다. 그에 반해 성인의 학습은 이미 가지치기가 끝나 비교적 안정된 신경망 위에서 연결을 새로 만들거나 강화해 나가야 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큰 노력이 든다.
아이의 신경생리학적 유리함이 절대적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렇지 않다. 그러나 따져보면 아이는 끊임없이 부모와 말하고, 실수하고, 반응을 받아가는 등의 다양한 상호작용을 통해 언어를 익히게 된다. 절대적인 건 막대한 노출 시간과 상호작용이다. 이건 성인의 노력으로 따라잡을 수 있는… 어쩌면 그럴 수도 있는 면이다. 노출 시간은 어찌할 수 있다. 요즘같이 인터넷과 유튜브가 발달한 시대에는 외국어 인풋을 늘리는 건 어렵지 않을 터다. 남은 건 인출 경험을 늘리는 건데, 구조적인 방법을 고안해야지 뭐. 내 입장에서 효과적인 인출 수단은 글쓰기 아닐까?
인출 경험치는 Comprehension으로 이어진다- 써보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막상 문장을 짜려 들면, 읽을 때는 지나쳤던 자리에서 자꾸 막힌다. 이 동사 뒤에 전치사가 뭐였더라, 이 뉘앙스를 영어로는 어떻게 다듬더라. 그 막힘이 곧 내 언어 지식의 빈틈이다. 읽기만 할 때는 그 빈틈을 못 느끼고 지나간다. 이 빈틈을 메꾸는게 어린 아이가 부모와의 상호작용으로 얻는 피드백에 대응할 수 있다. LLM을 활용해서 교정을 보는 것도 좋은 효과를 볼 것 같다.
한 번 쓰려고 헤매고 나면, 다음에 같은 표현이 눈과 귀에 걸린다. 빈틈을 자각한 만큼 입력을 예민하게 처리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글쓰기는 기억에서 단어를 꺼내는 인출 연습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내 빈틈을 드러내고 입력을 더 깊이 처리하도록 강제하는 장치에 가깝다.
또한 남이 떠먹여 준 표현보다 내가 직접 빚어낸 표현이 더 깊고 유연하게 남는다. 애써가며 만들어 본 글과 비슷한 글을 만나면 빠르고 깊이 이해할 것이다. 그렇게 쌓인 표현들이 다음 독서에서 예측의 재료가 된다. 앞서 말한 “진한 경험치”란 이런 깊은 처리의 누적일 것이다. 훑어보기로는 이런 자극 경험이 쌓이지 않는다.
Don’t be frustrated. Just keep going.
한가지 영역이 조금 앞서나갈 수는 있어도 멀리 앞설 수는 없다. 같이 함께 가지 않으면 하나만 연습하다보면 수확체감의 법칙처럼 효율이 확 떨어지는 걸 체감한다. 긴 시간 어휘에 매진했고, 당분간은 발음에 집중했다. 인출의 경험은 회사 생활로 메꿨다. 어느 하나라도 미진할 때마다 성장의 속도는 느려졌다. 지금까지 참으로 긴 시간이 걸렸다.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여러 장기말을 천천히 전진시키는 것 같은 시간이었다. 덕분에 이제 인풋을 훅 늘릴 수 있는 시점이 되었다. 구성만 잘 하면 훈련이라는 인식없이 읽기, 듣기, 쓰기를 다채롭고 즐겁게 할 수 있다.
과거를 돌아보고 계획을 세워보는 건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걸 방지해준다. 실수와 작은 실패에 좌절할 필요는 없다. 많은 시행은 당연히 많은 실패를 불러온다. 그때마다 좌절하면 멀리 갈 수 없다.
인간의 뇌는 대체로 종합적이고 객관적인 분석을 못할 때가 대부분이다. 단순한 스탠스를 원하는 뇌에게는 “이것이 따라가야 할 길이다”이라고, 또 “실패는 배움의 기회”라고 설득하는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