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 회사 밖에서 다시 시작하며
1년 전만 해도 나는 스스로를 ‘독일에 사는 한국인, 페이먼트 도메인 백엔드 개발자’로 소개했을 것이다. 🤔 그게 전부라기엔 좀 심심하다. 17년 동안 윈도우즈 응용프로그래머로 시작해 콘텐츠 DRM 풀스택 개발자, Hadoop/HBase 기반 웹크롤러 개발자, 페이먼트 백엔드 개발자로 경력을 이어왔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2025년 10월, 1년 넘게 자율신경계 질환과 씨름한 끝에 회사를 그만뒀다. 17년 넘게 회사원이었던 사람이 회사를 떠나면 무엇이 될까? 개발자는 이직이 잦은 직업이라 한 회사에 정체성을 맡기지 않는 편이다. 기술과 경험도 어디 가지 않는다. 게다가 나는 취향이 뚜렷한 사람이다. 오랫동안 그림 그리는 삶을 꿈꿨고, 덕분에 나만의 미감이 있다. 지적 취향도, 문화적·정치적 세계관도 꽤 단단하게 구조화돼 있다. 특별히 잘하거나 잘 아는 건 없지만 🥲 제한된 시간과 돈, 노력을 취향에 나눠 쓰며 나름 첨예한 고유성을 키워왔다. 그래서 회사를 떠나 1년 가까이 요양하는 동안에도 나는 불안감 없이 나일 수 있었다.
그 1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아내 덕이 컸고, 모아둔 저축도 있었다. 그리고 가장 큰 버팀목은 독일의 사회보장제도였다. 만만찮은 보험료를 내온 덕에 실업급여를 충분히 받았고, 최근엔 창업지원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간단하게만 설명하자면, ALG I이라 부르는 기본 실업급여는 보통 최장 1년까지 받을 수 있지만, 대략 6~7개월을 넘지 않아야 창업지원금 Gründungszuschuss를 받을 수 있다.) 지원금은 홀로서기를 위한 발판이니, 돈을 벌고 세금을 내서 그 이상으로 돌려줘야지.
지금은 1인 개발자에게 기회의 시대 아닌가. AI와 바이브코딩이 바이럴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으로 자리 잡은 지금, 몸이 아파서였다 해도 회사 밖으로 나온 건 어쩌면 행운이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았다면 제 발로 나올 결단을 할 수 있었을까? 인디해커에는 예전부터 끌렸다. 2000년대엔 ISV, SOHO 같은 단어에 매혹을 느끼곤 했다. 그 중심엔 자율적인 창작 욕구가 있고, 그 창작의 뒷배가 되는 것이 나라는 개인의 고유성이다.
시장에서 아이템을 발굴하기보다, 세상을 보는 내 시각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창작욕이 아이디어의 원천이길 바란다. (물론 큰돈 앞에서는 얼마든지 굴복할 준비가 돼 있다. 😛) 다만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이해는 깊어야 한다. ‘그림이 좋으니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순진함을 지킬 수 있던 때는 오래전에 지나갔다. 그림이 좋다면 그림과 나, 세계, 소비자의 관계를 파악하고, 과감한 가설을 세워 제품까지 연결해야 한다. 40년 넘게 살아온 경험이 그 양분이 되길 바란다. 흔히 말하는 ‘취향과 경험을 파는 사업’을 꿈꾼다.
이제야 시작점이다. 완전히 회복하진 않았지만, 삐걱대는 몸을 다루는 방법은 익혔다. 슬슬 체력을 기를 단계다. 이쯤이면 노동이 가능한 상태라고 본다. 창업지원금도 곧 끊기고, 저축을 쓰기 시작하면 애가 탈 거다. 그렇다고 당장 돈벌이가 될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지금은 작은 경험을 쌓으며 가능성과 방향을 잡을 때다. 단계별 계획도 세워뒀는데, 그건 다음 글에서 풀어보려 한다.
‘나는 누구인가’에 명쾌한 답이 된 글은 아닌 것 같다. 내가 모자라서라기보다 언어와 인식의 한계 때문이라고 애써 합리화해본다. 한계 많은 언어로나마 요약하자면- 17년 차 개발자가 고유한 취향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AI 시대에 몸이 아파 회사를 나온 걸 기회라 위안하며, 생계 압박 속에서 꽃길 같은 사업을 과하게 기대하고 있다- 정도가 되겠다.
앞으로 이 계정에 아이디어, 만드는 과정, 시행착오를 솔직하게 기록해보려 한다.